위진남북조 시대는 법가사상과 노장사상이 대를 이어 위세를 떨쳤던 때다. 이 시기는 삼국의 혼란기를 거쳐 중세가 열리던 때로, 산업자본주의를 거쳐 21세기 정보지식산업사회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한국을 투영해볼 수 있는 좋은 무대다.

삼국시대의 상징적인 인물인 위무 조조는 건안삼령(建安三令)을 통해 유재시거(唯才是擧)라는 인사원칙을 밝힌다.

“한신과 진평은 더럽고 욕된 평판을 갖고도 국가대업을 이뤘다. 장군 오기는 출세를 위해 부인을 죽이고 사방에 뇌물을 뿌렸음에도 국가를 굳건하게 지켰다.” 유재시거는 오로지 재능에 따라 사람을 쓸 뿐 나머지는 불문에 부친다는 이야기다.

조조는 이를 통해 혼란기인 삼국시대에 위나라를 건국하는 성공을 거뒀지만 여기서 야기되는 폐단을 예측하지는 못했다.

삼국지 위지 두서전(杜恕傳)에는 “오늘날의 학자들은 상앙과 한비자를 스승으로 삼고 법가의 학설에 치우쳐 유가는 실제 사정에 어둡고 실용에 적합하지 아니해 세상에 널리 쓰이지 못한다고 다투어 비판하는 바 이는 풍속의 가장 심한 폐단으로 국가를 창업한 자가 삼가야 할 사항”이라는 말이 나온다. 재능과 법가적 통치에만 치우친 나머지 진심으로 국가를 보위하려는 선비를 양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나라는 결국 2대를 제대로 넘기지 못한 채 패망하고 말았다. 박정희 정권을 대표로 하는 개발시대 정권의 통치방식이나 인물기용 방식과 너무 흡사하다.

그러나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조조의 법가적 통치는 순식간에 귀족사회를 발판으로 하는 청담 현학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400년간 지속돼온 한나라 예교사회 및 조조의 법가적 통치에 반발하는 기풍이 당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노장사상 및 불교와 결합하면서 이같은 흐름이 부상한 것이다.

이 또한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국민들이 탈정치화에 몰입하면서 진지함을 회피하는 한국적 분위기를 닮았다.

조조의 법가적 통치를 건국을 위한 노력이라고 한다면, 이는 후진국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온 힘을 기울이던 우리의 60~90년대와 동일한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다. 양자의 공통점은 오로지 재능만을 존중할 뿐, 진심으로 국가의 장래를 고민하는 철학을 양성하지 못한 시기다. 그래서 외형은 성장했지만 내면이 그같은 성장을 따르지 못했기에 안팎의 괴리가 그 어느때보다 컸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위진시대를 거쳐 남북조시대가 맞은 상황은 그래서 나만을 생각하는 ‘청담과 현학’이 난무하고 배타적인 귀족집단의 영속성만을 꾀하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여기서 백성을 생각하는 경세가적 인물은 출현할 길이 없었다. 21세기 한국은 산업자본주의를 통해 배태된 귀족집단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정보지식산업사회의 총아들이 여기에 합류함으로써 그 배타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형국이다. 통틀어 신귀족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다름아닌 20 대 80사회의 전자에 해당되는 무리로, 그들은 남북조시대의 ‘청담과 현학’에 해당하는, 그들만의 예술과 생활을 즐기려는 강한 성향을 드러낸다. 이 속에서 계층간 갈등을 치유하고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진지하게 모색하려는 집단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남북조시대 귀족들의 생활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로지 나를 위해’(僞我)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이 단어는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유효하다.

20 대 80사회의 골을 깊게 하는 20의 특성은 21세기형 ‘위아’라고 규정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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