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 기질로 ‘작품’ 만들다

도시든 농촌이든 거리마다 넘쳐나는 것이 간판이다. 색깔도 화려하고 사람들의 눈을 끌게 하는 기발한 가게 이름도 더러 있다. 간혹 옛날 영화포스터 그림에, 나무창살로 된 미닫이문에 빨간 페인트로 ‘대폿집’이라고 쓴 복고풍 술집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마산 산호동에서 간판집을 하고 있는 차상옥(53)씨는 경력 33년의 베테랑. 한때 청년기에 화가의 꿈을 가졌던 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간판 일을 시작했는데 고교 때 미술반 활동도 하고 만화도 곧잘 그리는 아들을 보고 그의 부친이 간판일을 권한 것.

30년 넘게 해온 경력에서 남다른 감각이 그를 돋보이게 한다. 손님을 끌려면 상호가 중요한데 그가 만든 가게 이름을 들어보면 카피라이터 저리 가라고 할 정도. 최근 일본의 독도망언으로 각종 독도마케팅이 뜨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1년 전 그가 시공했던 간판은 앞을 내다 본 것이나 다름없다.

합성동의 독도장어구이집 정면 세로 간판의 ‘독도가 열 개라도 하나도 못 준다’문구가 대표작이다. 처음엔 별 호응이 없었던 주인이 개업하고 나서 손님들도 좋아하고 많이 찾는다고 그에게 술 한잔 사더란다.

대부분 상호를 정해오는데 간혹 뭐라고 할지 이름을 물어올 때가 있단다. 그렇게 탄생한 상호 중에서 하나가 ‘짱어짱’. “경상도의 억센 발음에 양쪽에 ‘짱’자가 대칭이 되니 사람들이 좋다고 난리였다. 상호가 너무 좋다고 상표 등록하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고교졸업 후 아버지 권유로 시작…간판변천사 훤해

상호뿐만 아니라 개업날 붙이는 플래카드도 단순하게 며칠 개업이 아니라 며칠부터 ‘꾸워 재낍니다’라는 문구로 달아 줘 손님들의 인기를 끌었단다. 한마디로 작품이다.
IMF 외환위기 때 퇴직한 사람들이 창업을 많이 해 간판집이 경기가 좋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불경기일수록 간판주문이 느는 게 사실인지 물었다. 그는 “안 맞는 말은 아닌데 이전에는 퇴직자들이 창업을 많이 해서 그런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길거리에 빈점포가 많으니 그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경기가 좋지 않으니 단체나 기업체에서 행사를 할 때 선전탑이나 애드벌룬을 띄울 것도 현수막 몇 개로 줄이는 현실이고 봄철을 맞아 가게에서 새단장을 한다고 조금 주문이 있는 정도란다.

그는 7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간판의 변천사도 꿰고 있다. 그 당시만 해도 함석판에 페인트로 글씨를 쓴 간판이 주를 이뤘단다. 전화가 귀할 때라 간판에 가게 주소를 써넣었던 것이 특색.

또 업종에 따라 상호와 함께 그림을 꼭 그려 넣었던 것이 그때 간판 모양새였는데 약국간판에는 엄마가 아기를 안고있는 그림이나 병아리, 미용실은 파마머리 여자, 농약·종묘사는 과일그림.

그가 들려주는 그림 중에 술집간판이 압권이다. “두건을 두른 문어의 발에 술통, 젓가락, 접시, 술사발이 들려있는 그림이 없는 선술집 간판이 없을 정도였다.”

그 당시 만해도 저녁마다 글씨, 아파치나 유명한 영화배우의 얼굴을 그리는 연습도 했단다. 글씨체도 그 가게의 분위기에 따라 다른데 한정식 집은 예스러운 글씨, ‘황태자’같은 상호는 고급스런 글씨였다고 전했다.

그는 “글씨부터 그림까지 수작업을 하던 시절이라 간판만 봐도 어느 간판집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정도였다”고 말했다.

70년대 석유파동에 따른 정부의 에너지절약 정책으로 당시 네온사인 간판은 못 달던 시절. 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네온사인 간판을 허용해주면서 다시 활성화 됐단다.

직접 지어준 상호 인기, “장사 잘 된다는 말에 보람”

“그때 네온사인 기술자를 못 구할 정도로 물량도 엄청났고 학원까지 생길 정도였다”는 그는 네온사인 글자모양으로 유리관을 만드는 공장까지 차렸었단다.

손으로 직접 그려 만들던 시대에서 간판의 일대변화는 조명이 되는 아크릴간판이 나오면서 부터. 아크릴 간판 때만해도 글자를 짜서 톱으로 잘라 붙이던 시스템이었다.

그런 것이 요즘에는 도안전문프로그램으로 컴퓨터가 알아서 모양에 맞춰 접착시트지를 잘라내면 간판에 붙이면 되는 시대가 됐다. 컴퓨터로 사진을 그대로 간판에 박을 수 있는 기술까지 나왔다.

시대가 변했으니 전통적인 간판 기술은 써먹을 데도 없다. “예전에는 기술싸움이었는데 요즘은 가격싸움”이라는 그는 이제 이일도 접어야할지 고민이란다.

“나같이 예전부터 간판집을 해온 사람은 ‘장이 근성’이 있어서 덤핑으로 주문이 들어오면 아예 받지를 않으니 사업가로서는 좀 안 맞는 것 같다.”

또 장비를 들이려면 그만큼 자본도 필요하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 일이 많을 때는 직원이 13명까지 됐는데 요즘은 혼자서 해도 일거리가 그렇게 많지 않단다.

그래도 간판일을 계속 하는 것은 그의 작품으로 장사가 잘돼 확장 이전한다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