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안있으면 5.16쿠데타가 일어난 지 꼭 40년이 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최근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국고지원을 반대하는 운동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꿈쩍도 안한다.

   
 
 
시민단체 회원에 의해 철거됐던 서울 문래공원의 박정희 흉상이 영등포구청에 의해 복원된 것도 역사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점에서 당시 박정희 정권의 성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보고서가 있다. 유신통치가 절정에 이르렀던 74년 6~7월 사이에 앰네스티 국제위원회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씨알의 소리 > 74년 4월호에 게재되면서 전해졌다.

“1961년 5월에 그 당시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여 군사쿠데타가 발생했다. 박정희 소장은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당을 금지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신문을 검열했다.

그후 6일동안에 정부는 2014명의 정치인을 체포했으며 ①수천명의 공무원과 수백명의 군장교를 체포, 구금 내지 해고시켜버렸으며 ②일체의 데모를 금지시키고 ③64개의 일간신문 중 몇 개를 정간시켰고 1961년에 2만2196건을, 그리고 1962년에 3만5044건을 군법회의에 회부했고 ④중앙정보부가 창설되어 군사정권을 지원하기 위해서 27명의 중요한 실업가들로부터 약 3700만달러를 강청했다.”

보고서는 유신헌법의 반민주성에 대한 언급으로 이어진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선거에서 더 이상 출마하지 않겠다고 엄숙히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8개월 이후에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한국정부는 유신헌법에 대한 1차적인 이유로 남북통일을 위해 북한과 협상을 촉진시킨다고 했으나 유신헌법은 한국의 역대 헌법 중에서 가장 독재적인 헌법이었다.”

이런 유신헌법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보고서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①한문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결과 일반대중은 국민투표 내용에 익숙하지 못했다. ②정부는 국민투표에 관한 토론을 금지했다. ③정부는 포스터와 정부기구를 통해서 유신헌법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④투표용지는 결과적으로 누가 부표를 던졌는가를 알 수 있게 만들었다.…유신헌법은 작년 컬럼비아대에서 저명한 몇몇 한국 및 미국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이 유신헌법은 근본적으로 반민주적이고 독재적 성격을 띤 것으로 박대통령의 영구집권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상기 학자들이 비공식적으로 동의한 내용이었다.”

이같은 유신헌법에 따라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체포.구금되었고 일부는 사형까지 당했다. 앞서 몇차례에 걸쳐 보도한 민청학련 사건이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앞에 인용한 앰네스티 보고서는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대량구속 사건 외에도 유신독재에 항거한 크고 작은 사건들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현 마산MBC 전정효(53) 방송보도국장도 유신정권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당시의 학생운동은 주로 이념서클이나 학회 중심으로 이뤄졌다. 바로 이것이 80년대 이후 총학생회 중심의 학생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전정효 국장은 당시 경북대 정외과 3학년으로 ‘바르게 나아가자’는 뜻을 가진 ‘정진회(正進會)’라는 이념서클의 회장이었다. 전 국장을 비롯한 회원 7~8명이 71년 4월께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글이 문제가 된 필화사건으로 구속됐다. 전 국장은 당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탈출에 성공,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해 추석을 맞아 집에 갔다가 대기중이던 수사관들에 의해 재차 연행되고 말았다.

전 국장이 연행되자 10월 7일 경북대 법대생 20명은 연명으로 정진회 사건 관련자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이재오, 해방후 한국 학생운동사, 형성사, 1984)

그 후 전 국장은 학교에서 제적당했으며, 보석으로 풀려나왔으나 곧바로 군에 징집됐다. 74년 8월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했으나 유신정권의 탄압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입대 전에 함께 활동하던 여정남(45년생)씨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돼 있었다. 여정남씨는 전 국장과 같은 경북대 정외과였고, 경북대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정진회 사건으로 함께 구속되기도 했던 동지였다. 여정남씨는 그로부터 7개월만에 전격적으로 사형되고 말았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집행은 지금까지도 충격으로 남아있습니다.” 전 국장은 지금까지도 당시 희생자들에 대한 부채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듯했다.

현 경남도민일보 논설위원인 경상대 경제학부 장상환 교수도 역시 유신정권의 피해자이다. 그는 71년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3학년이었다. 그해 6월 서울대 교련반대 가두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이상완(언어학과3).공영채(경영학과2)씨 등과 함께 구속됐던 그 역시 제적과 함께 강제징집됐다. 전정효 국장과 비슷한 시기에 군복무를 마치고 역시 74년 8월 전역한 후, 2학기에 복학이 이뤄졌으나 75년 김상진 열사의 자결에 항의, 5.22시위를 벌이다 다시 수배됐다. 앞에서 소개한 서울의대 서광태씨도 역시 이 시위에 연루됐었다. 약 1년간의 수배생활 이후 76년 복학한 장 교수는 강원룡 목사가 설립한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77년 이곳에서 상근간사로 일했다.

그러나 79년 4월 크리스찬아카데미에 대한 정권의 탄압으로 또다시 구속돼 81년에야 출소하게 된다. 그후에도 그는 국제경제연구원(현 산업연구원)에 연구원으로 합격했으나 신원조회로 강제퇴직당하는가 하면 83년에도 한국산업경제연구원 연구원이자 연세대대학원 석박사통합과정에서 외국의 불온(?) 학술서적을 복사해 연구자료로 이용하려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정권의 탄압을 받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밖에 현 경남대 심지연 교수도 75년 6월 천주교정의구현 전국학생총연맹 사건으로 당시 서울대 대학원에 재학중 동료학생 22명과 함께 구속됐다. 이 사건은 5.22 서울대 김상진 열사 추도식 시위사건의 배후를 조사하던 도중, 민청학련 이래 범대학연합체를 구성하여 대규모 시위를 기도한 혐의가 드러났다고 당국은 발표했다. 심지연씨를 중심으로 전국 18개 대학을 연결하여 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하기로 하고 ‘발기문’과 ‘제1시국선언문’‘제15차 4.19선언문’ 등을 제작하는 등 준비를 해왔다는 것이다.

또 76년 3월에는 한신대 전점석 등 학생 3명이 유신철폐와 긴급조치 9호 해제, 민주인사 석방, 해직교수 복직, 학장 퇴진 등 주장을 담은 유인물을 작성해 시위를 기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당시 이 사건을 주도했던 전점석씨는 현재 진주YMCA 사무총장으로 있다.

78년에는 10월 18일 광화문 군중시위가 은밀히 준비됐다. 이 시위는 크게 서울대 그룹과 6개 대학 연합회, 학외 그룹 등 세갈래에서 준비돼 왔으나 경찰의 사전 정보에 의해 D데이 이전에 40여명이 검거돼 버렸다. 이때 함께 구속됐던 주동인물 중에는 남해 출신으로 현재 한나라당 중앙당에 있는 정태윤씨와 민주노동당 마산합포지구당 주대환 위원장이 포함돼 있었다.

이에 앞서 71년 9월 4일 경남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진주농대(현 경상대학교) 교수 90명이 ‘대학자주선언’을 발표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런 가운데 마산에서는 앞서 소개한(시리즈 67~68회) 재경학우회와 경남대 일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문화운동과 양서조합운동이 일고 있었으며, 이는 79년 10.18 부마민주항쟁의 주요한 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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