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마산출신 서광태씨의 모친 최말순씨가 쓴 호소문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중략) 독방이라는데 넣어서 쇠사슬로 온 몸을 묶은 채 피멍이 들도록 구타하고 일주일동안을 스피커를 틀어놓고 잠을 재우지 않았답니다. 잠을 잘래야 잘 수 없는 불면의 고통과 공포 속에서 정신착란증 증세를 일으켜 육군 보안사 수사관에 의해 제1심 심리가 진행 중 1976년 4월 19일부터 5월말까지 정신착란증으로 재판에 응하지 못하고 육군통합병원에 치료라는 명목으로 입원했습니다. 그 한달동안 가족은 물론 변호인의 면회도 금지되었습니다.(…) 법정에 나온 나의 아들은 부모는 물론 형제간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은 초점을 잃어버린 채 넋나간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가까이서 보는 손은 경련으로 떨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검사가 묻는 말에 무조건 ‘예’만 연발하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렸습니다. 예 예…. 내 아들을 어떻게 하여 육군보안사에서 ‘예’라고만 대답하는 기계로 만들 수 있었는지.

…(중략) 저는 육군 보안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이러한 반공법을 다루는지는 더 더욱 몰랐던 오직 생활에만 여념이 없었던 순박한 6남매의 에미였습니다. 다만 내 자식이 관련되었던 이 사건에서 서울 의대생 14명이 무궁한 앞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간 이하의 고문으로 무참히 짓밟을 수 있었던 무시무시한 권력기관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간첩이란 이름의 강종헌이 2심 최후 진술에서 자기는 이북에 갔다 온 적도 없고 이북의 공작원은 더 더욱 아니라고 했습니다. 수사를 받는 도중 느낀 일이지만 대한민국의 국시가 반공인줄은 알지만 데모 좀 한 학생을 용공으로 모는 것 같아 슬픔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래도 좋은 지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죄없는 이 어린 학생을 과거에 데모 좀 했다고 간첩으로 몰아 구만리 같은 앞길을 이렇게 무참히 짓밟은 이 책임을 누가 질 것입니까 육군 보안사입니까 학교당국입니까 아니면 엉터리 재판을 한 재판관입니까 ”

최씨가 호소문에서 주장하고 있는 대로 이 사건은 혹독한 고문에 의해 조작됐음이 사실상 입증됐다. 79년 10 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후 곧바로 사면조치에 의해 복역중이던 관련자들이 모두 석방됐던 것이다.

75년 11월 29일 당국이 발표한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 관련자는 모두 14명이었다.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울의대 : 강종헌 서광태 전성환 황혜원 황승주 진관보 정필현 이인수 송군식 장우환 전영훈 이근우

△서울 문리대 : 나병식

△고려대 : 박종열

이들은 75년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이 전격 사형된 데 이어 11일 서울 농대생 김상진군이 양심선언과 함께 할복자살하는 등 사건이 잇따른 가운데 김상진군 추모행사와 민주인사 석방운동을 벌였던 순수한 운동권 학생들이었다.

박 정권은 이들에게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함으로써 대국민 반공교육용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변호사들도 긴급조치 9호 위반죄는 인정하지만, 간첩죄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 관계자 14명 중 강종헌 서광태 박종열만 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광태씨는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0 26 이후 석방됐고, 이듬해 3월 복교하여 현재 의사로 재직중이다. 당시 이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고문이 자행됐는지는 서광태씨의 상고이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다소 길지만 당시 고문의 실상을 살펴보자.

“75년 11월 29일(토) 오전 9시 10분, 10여분 늦게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가방을 들고 강의실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는 수사관님들을 따라 나서서 서울역 부근의 모처 지하실에 도착 즉시, 무수한 폭행에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이를 씻은 핏물을 마시우는 등의 무시무시한 공포분위기와,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지만, 무릎을 꿇려 앉히고는 그 아래 박달나무 곤봉같은 나무를 집어넣고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워카발로 허벅지 위를 짓밟는 통에 기절하였음은 물론, 정강이 아래는 피투성이가 되고 나무마저 자근동 부러졌습니다. 옆방에서도 찢어질 것 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고문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본인도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 누르는 등의 무수한 육체적 고통이 가해졌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무수히 많은 수사관님들이 차례로 들어와서 감시하는 통에 계속해서 한 주일 이상을 거의 자지 못한 데서 오는 불면의 고통과, ‘면도칼로 살껍데기를 벗기겠다. 빨갱이는 삼족을 멸하니 너하나 쯤이야…’라는 그 지하실의 전율할만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말들이었습니다.

…(중략)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환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히 죽음의 살인극에 휘말린 것입니다.…이윽고 자고 싶어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뭐 너도 이북에 갔다 왔어…’ 운운의 미칠 소리를 해대며 며칠을 계속해서 밤이면 고문의 비명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디서 가만있지, 얼마나 공이 많이 들었는데. 야! 고집부리지 말고 타협하자….’

단식으로 버티던 체력도 한계에 이르고, …기억이 없습니다. 오직 안가겠다고 반항하며 어디론가 개처럼 끌려간 기억뿐입니다. 얼마 후 병원입니다. 정신이 들락말락 하면, 무슨 신문에 북괴라고 쓴 옆에다 별표(인공기 표식 - 기자 주)를 하여 다시 간첩이라는 망상에 빠지게끔 세뇌하였습니다. 백의의 천사님이 오셔서 부릅니다. 조용 조용 말씀하십니다. ‘…(평범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느닷없이) 자수하셔요….’

육감적입니다. 전혀 기억이 희미합니다. 상처도 있고, 아직도 생생한 담뱃불로 지진 자국을 병원에서 얻은 것 같은데,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간첩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 자수하자. 내가 이북에 갔다 왔나 …”

…(중략) “강종헌이 알지 ” “잘 모릅니다” “야, 이새끼야 , 왜 몰라!” “….” 무수한 폭행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하고 화장실에 가니, 또 다른 나의 벌건 선혈이 뚝뚝 바케스째 기다립니다. 얼핏 거울을 보니, 피에 뜯긴 해골이 짓이겨져 있습니다. 수직으로 거꾸로 세워서 팔굽혀 펴기를 시킵니다. 못먹고 자도 못잔 해골에 피가 몰려 쓰러지면, 기다리는 것은 즐거운 발길질입니다.

…(중략) 그리고 옆방에서 교포학생이 계속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독하던 서투른 한국말의 고문소리도 점점 낮아집니다. “이 새끼 이북에 갔다 왔지 ” “아닙니다” “….” 항거하던 어린 참새도 이젠 날갯죽지가 쭉쭉 찢어지고, 사지에 넣어 비틀던 지렛대가 부러졌나 봅니다.

바로 이곳이 독재의 금과보도로구나. 바로 이곳이 생사람 잡아 산송장 만드는 조작극의 현장이구나.(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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