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어려움 내게 와도… ‘펜’ 과 함께라면 행복”

   
 
 
장골목에서 과일노점을 하며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종이쪽지에 수기를 쓰는 전찬애(63·의령군 의령읍) 할머니. 시장에서 노점을 한지가 30년이 넘었으니 그렇게 글 쓰기도 30년이 넘은 셈이다. 또 아홉 살부터 일기형식으로 글을 써서 모아왔다고 하니 작가의 이력이 50년이 넘었다고 말해도 과하지 않다.

과일을 팔며 글 쓰는 할머니를 보고 꼭 다른 사람에 소개하고 싶었다는 한 사진작가의 제보를 쥐고 마침 5일장이 열린 23일 의령장을 찾았다.

30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의령읍 남천탕 앞 모퉁이에 자리잡은 할머니의 과일 노점에는 추석대목을 맞아 장을 보러 나온 손님들로 붐볐다.

“아홉 살 때부터 어머니가 구박받는 모습을 보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할머니는 “그때부터 이렇게 틈만 나면 글을 쓰는데 꼭 책을 내고 싶다”며 부끄러워한다.

무슨 한이 그렇게 맺혔기에 글로 남기고, 책을 내 세상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사연이 있을까.

할머니가 기회만 되면 책을 내기 위해 1차 마무리해놓은 원고지 1000장 분량의 ‘고향 떠난 두 남매 길’이란 제목에서 애틋한 느낌이 전해진다.

장소도 종이도 가리지 않는 ‘글쓰기’

지난 2000년에 마무리한 이 수기는 의령 궁류면 당동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첩살이로 나이 스물 하나 되던 해에 어머니, 오빠와 쫓겨나다시피 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충청도 청주로 옮겨 산지 5년 만에 중풍을 앓던 모친이 떠나고 3년이 지나 오빠마저도 세상을 떠난다.

“엄마가 아파 죽도 못 먹어서 다 큰 처녀가 동냥을 얻으러 다니기도 했다”는 할머니의 말에 숙연해졌다.
결혼을 해서 부산으로 옮겨 생선, 마늘장사를 시작해 돈도 벌게 되고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와 지난 98년에 청주에 있던 모친과 오빠의 묘도 고향으로 옮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내가 외롭고 슬퍼 할 적에 나를 달래주던 정답던 펜 친구야. 너는 언제나 나의 유일한 친구, 나의 무릎 위에서 나와 함께 있으면서 나에게 힘을 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 이제는 너도 마음 편안히 쉬고 나도 쉬어야겠다. 그럼 안녕.” 할머니의 수기 마지막 마무리 부분이다.

그렇게 쉴 수 있는 인생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과일행상을 하면서 감나무 밭을 샀다가 사기를 당하고 태풍매미로 피해를 보고 빚을 지게 되면서 고난의 삶에 다시 접어들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시련에 굴복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렇게 해왔듯이 ‘유일한 친구’인 펜을 들고 글을 쓰면서 이겨냈다. 할머니는 “실패를 많이 해서 빚도 많지만 돈 갚아 가는 게 재미난다”며 “모욕을 당하기도 하는데 글을 쓰면 즐겁다”고 말한다.

“내 글로 많은 사람 용기얻었으면”

굳이 책을 내고 싶은 이유도 있다. 요즘 살기가 어려우니까 젊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자살하는 소식도 잦다. 그런 세태에서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젊은 사람들에게 극복하는 힘을 주고 싶다”는 게 할머니의 속뜻이다.

할머니의 글쓰기는 장소도, 종이도 가리지 않는다. 과일 팔다 종이가 없으면 박스를 찢어서도 글을 쓴다. 요즘은 두 번째 수기를 적고 있다. 실패를 하면서 이겨내는 삶과 자신을 믿어주며 도와주는 이웃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빚을 지면서 충격을 받아 할아버지는 몸져누웠지만 아들 둘, 딸 셋 자식 다섯은 반듯하게 자기 할 일 하며 잘 컸단다. 노총각, 노처녀 자식들이 빚을 갚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을 정도니 할 말이 없었다.

책을 내고 싶어 청와대까지 가봤다는 할머니. 이담에 꼭 책이 나오면 대통령께 맛있는 과일 한 박스와 책 두 권씩 보낼 작정이다.

할머니의 일상은 바쁘다. 1일엔 함안 대산장, 3일엔 의령장, 4일엔 신반장, 5일엔 함안 가야장에 과일 팔러가야 하고 장이 서지 않는 2일엔 조그만 밭뙈기를 손봐야 한다.

과일 팔며 글쓰는 할머니를 만나려거든 장이 서는 날 의령읍 남천탕 앞, 신반 축협 앞을 찾아보라. “기자 양반, 책 낼 수 있는 방법 없나요.” 할머니의 남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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