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특히 ‘대중’이란 말을 앞에 단 예술은 대체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현실을 담으려 애쓴 작품이 있는가 하면, 내면에 깔린 필연성 때문에 닮아버린 경우도 있다. 드러난 현상이 닮은꼴일 때도 있고, 짜임새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때도 있다.

95년 가을, 젖가슴이 큰 배우 ‘진도희’를 단숨에 ‘스타덤’에 올려놓으며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 눈길을 끈 <젖소부인 바람났네 designtimesp=21282> 시리즈. 당시는 <물소부인 바람났네 designtimesp=21283> <꽈배기부인 확 풀렸네 designtimesp=21284> <김밥부인 옆구리 터졌네 designtimesp=21285> 등 모방작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교성과 교태로만 일관돼 있겠지 짐작하지만, 젖소부인 시리즈는 대부분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등 고전소설에서나 찾을 수 있는 ‘교훈’을 줄거리로 갖추고 있다.

이를테면 <젖소부인 바람났네·3 designtimesp=21290>이 전형적이다. 주인공은 성폭행 당해 숨진 아내 혜정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경찰에 붙잡힌 성폭행범이 “당신 아내는 숨지는 순간까지 ‘세게, 더 세게!’를 요구했어”라는 비아냥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자신을 꾀어들인 여자들과 침대와 욕실·의자에서 땀을 흘리며 헐떡거리다 아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살해한다.

어느 날 죽은 아내를 닮은 여자를 우연히 만나 ‘다른 여자들과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뒤따라가 거칠게 벗기지만 끝까지 저항한다. 주먹으로 반항을 억누른 뒤 올라타고 헐떡거리는 순간,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숨지고 주인공은 이제야 깨달은 듯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수하러 경찰서로 들어간다.

하지만 이 교훈적 줄거리는 작품의 목적이 아니다. 단지 벗은 몸매, 과장된 몸짓과 ‘부적절한 관계’에서 오는 흥분 상태를 다양하게 꾸며서 보여주는 수단일 뿐이다.

젖소부인의 작품 구조는 자본의 논리와 닮아 있다. 알다시피 자본은 이윤 추구가 목적이지만 대놓고 입밖에 내지는 않는다. 젖소부인의 목적은 ‘패션 비용이 대폭 절감된 화면’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데 있으나 전면에 크게 내세우지는 않는다.

젖소부인은 인과응보라는 교훈을 줄거리로 세웠지만, 눈길을 끄는 장치가 못된다면 바로 쓰레기통에 처넣을 것이다. 자본도 마찬가지. 사회발전이나 정보화·편리 등 공익을 표방하지만 돈이 안된다면 그 따위는 언제든지 팽개칠 자세가 돼 있다. 안락한 주거 환경을 조성한다면서도 초과 이윤 창출을 위해서는 부실 공사도 서슴지 않는 것처럼.

서로 어긋나는 목적과 수단, 완전 딴판인 겉과 속. 자본의 논리와 ‘젖소부인들’에서 이들은 더 많은 눈길을 붙들거나 더 큰 이윤을 올리기 위해 이뤄진, 부조화스럽지만 튼튼한 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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