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회, 경찰서장 사찰계장 특무대상사 등 학살주범 고발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군의 양민학살보다 훨씬 잔혹하고 조직적이며 철저히 계획적인 학살범죄는 오히려 한국군 특무대(CIC)와 경찰이 저지른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이다. 물론 피 학살자의 숫자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후자가 많았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6월초의 한 신문보도는 당시 마산 보도연맹원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타 타 타 탕’하는 총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연맹원들을 모두 바닷물에 밀어넣은 군경은 LST를 서서히 선회하며 물위로 고개를 내미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조준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푸른 바닷물이 핏빛으로 변해갔다.(목격자 윤봉근씨(사망·1999년 증언 당시 69세·마산시 창포동)의 증언)

   
 
 
시민극장에서 마산형무소에 옮겨 수감된 보도연맹원들은 8월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갔다. 군경은 이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앞 뒤 사람의 허리를 나일론 줄로 묶었고 양손도 결박했다. 얼굴에는 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씌웠다. 마산 창포동 해안으로 끌려간 이들은 다시 LST(상륙함)에 실렸다. LST는 엔진소리를 최대한 줄인채 한참을 나아갔다. 약 한 시간이 지났을까. 속도가 서서히 줄어드는 듯 싶더니 공포에 질린 연맹원들을 뱃전에 세운 후 소총 개머리판과 군홧발로 바다 속에 처넣기 시작했다.

51명의 여자들이 있는데 이중 47명은 강간에 응했다고 해서 살아났고 거절한 4명은 즉시 없어졌습니다. 마산형무소의 담벽에 43발의 탄환 자취가 있습니다. 시체의 손발을 철사로 묶어서 집단적으로 열 명 스무 명 수장을 했는데 죽은 시체가 사변 그 당시에 어망에 걸려 들었던 일이 있습니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당시 보도연맹원 중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하는가 하면, 중·고등학생도 학살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960년 6월 5일 경남도지사실에서 열린 국회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에서 당시 마산유족회 간부였던 김용국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6개월 전인 1949년 12월 28일자 ‘남조선민보’에 따르면 당시 보도연맹 마산지부는 마산상고와 마산중·마산여중 교감 이상과 연석회의를 갖고, 이들 3개 학교 학생 중 보안법 위반으로 중퇴한 300여명 전부를 보도연맹에 가맹시키기로 합의했다. 필자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마산여중 학적부를 뒤져본 결과 1948년과 1949년 각각 159명과 122명이 제적 또는 자퇴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당시 17세였던 박○전(마산부 표정142)양의 경우 “교내에 불온세포 조직하려다 경찰에 구금되어 1949년 5월 1일부로 제적”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이 밖에도 이○순(19), 강○자(19), 박○순(19), 허○아(18), 김○애(17)양이 ‘불온단체 가입’ 또는 ‘교내질서문란’의 이유로 제적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4·19 이후 보도연맹원 등 1500명 학살 사실 백일하

이와 관련해 당시 마산상고 재학 중 보도연맹원으로 가입, 오빠(19)를 잃은 팽상림(68·현재 부산거주)씨는 “미술부원이었던 오빠는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학생동맹에서 부탁한 포스터를 그려줬다는 혐의로 퇴학당한 후 보도연맹에 가입돼 무참히 학살됐다”면서 “어린 학생들까지 사상범의 누명을 씌워 재판도 없이 학살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같은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들은 누구일까? 마산지구 양민피학살자 유족회가 1960년 7월 19일자로 마산 검찰지청에 제출한 고발장에 따르면 당시 학살사건의 주범으로 조영운 전 마산경찰서장(1960년 당시 경남교통협회 이사·경전여객자동차주식회사 근무), 구중억 전 마산경찰서 사찰형사, 최익주 전 형사반장, 이부종 전 형사, 강상봉 전 사찰계장, 정도환 전 사찰계장, 노양환 전 특무대 상사 등 11명을 지목하고 있다. 또 마산에서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가입을 독려했던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지도위원회(검찰지청장, 경찰서장, 시장, 창원군수, 형무소장, 경찰서, 사찰계장), 상임지도위원(김종규, 정인수, 김순정, 김종신, 최광림, 배린, 박양수, 문삼찬, 조철제, 김순명, 이석건)이다. (<남조선민보 designtimesp=14845> 1949년 12월 8일, 1950년 3월 28일자)

원전 앞바다·성주사 골짜기 등 광범위한 곳서 자행

학살이 자행된 곳으로는 마산 원전 앞바다 외에도 창원군 진전면 봉곡리 ‘안데미골’, 마산시 봉곡리 수원지 입구 산골, 마산시 월영동 뒷산 ‘요색고개’, 창원면 남산, 창원고개, 창원군 구산면 산골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창원 성주사 골짜기에서도 진해로 끌려가던 민간인들이 집단학살됐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필자는 취재과정에서 파도에 떠밀려 온 보도연맹원들의 시체가 매장된 터를 5군데나 확인했다. 지금이라도 삽으로 흙을 파면 유골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당시 구산면 심리·원전·옥계·남포·설진리 해안에는 시도 때도 없이 나일론 줄에 묶인 시체들이 떠밀려 왔다. 이 때문에 한동안 이 바닷가 주민들은 끔찍한 생각에 차마 생선먹지 못했다고 한다.

진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과 보도연맹원들도 1950년 7월말 진주가 인민군에 함락되기 직전 곳곳에서 집단총살당했다.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둔덕마을 골짜기에서 집단총살 당한 200여명의 민간인도 진주에서 끌려온 보도연맹원들이었다. 둔덕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소화광산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은 구리가 났었는데, 해방 후에도 곳곳에 폐광이 남아있었다. 저수지 옆 작은 골짜기에는 금굴이라는 폐광이 있었다. 시체는 이곳과 인근 골짜기 등 2군데로 나눠 암매장됐다. 이 가운데 한 곳은 지난 2002년 9월 태풍으로 돌무더기와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면서 유골이 무더기로 드러나 학살사실을 증명해주기도 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