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단 한 장밖에 없는 뉴스사진이 특종이 되어 포토 저널리즘의 특성을 최고로 발휘할 때가 있다. 사건이란 마치 태풍과 같은 것으로 어떤 사건의 순간이 지나가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일상의 상태로 돌아가 흔적도 없어진다.

오늘날까지 화제가 되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과 함께 기록으로 남긴 유명한 특종사진이 많지만 우리 지역에서도 특종사진이 분명히 있음을 밝히고 싶다.

그것은 바로 1960년 4월 11일 오전, 마산 중앙부두 앞에 떠오른 김주열군의 시체를 가장 먼저 찍은 사진을 두고 말한다.

이때 놓칠 수 없는 사실은 주열군의 시체가 바다 위로 떠올랐을 당시, 기자들 중에 제일 앞서 현장에 달려온 사람이 부산일보 마산주재 허종(許鐘·37)기자였다. 10대 소년의 오른쪽 눈에 포탄같은 쇠붙이가 박힌 채 조류에 흔들거리는 참혹한 모습을 그대로 포착한 보도사진이 온 세계를 놀라게 했으니 말이다.

이 사진은 즉각 AP통신을 통해 국제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사진에 충격을 받고 즉각 허터국무장관에게 성명발표를 지시할 만큼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그러니까 이 사진이 당시 퓰리처 사진상 후보에 오를 만큼 유명세를 탄 것만은 틀림없다. 당시의 상황을 회상한 허종기자의 글 <내가 겪은 의거얘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바로 4월 11일 낮 12시, 내 귀를 번쩍하게 해 준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언론계 후배 서모였다. 이때 나는 신마산 외교다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헐레벌떡 들어선 그는 다방 안을 한번 두리번거리더니 슬그머니 내 귀에 대고 “지금 중앙부두에 틀림없는 김주열 시체가 떠올랐습니다. 빨리 가보이소!”하는 것이었다. 마치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살며시 다방을 나섰다. …(중략)… 김주열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중앙부두를 향해 달리는 다리는 무감각으로 빨랐다. 1㎞ 이상되는 거리를 특종의식도 작용하여 단거리선수라도 되는 양 뛰었다. 옷속에 숨겨둔 카메라가 겨드랑이 밑에서 덜렁거렸다. 현장에 달려가 시체를 목격했을 때는 숨이 가빠 카메라를 끄집어 내기 힘들었다. 날은 맑고 흰구름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스포츠머리를 한 소년의 시체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동그스레한 얼굴에 오른쪽 눈엔 쇳덩이가 박혀있고, 마치 복싱을 하는 자세로 물위에 떠올랐다가 내려갔다 하고 있었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채 갖다버린지 1개월만에 떠오른 주열군 시체사진을 잘 찍기 위해 꽤나 시간이 걸렸다. 물결이 잔잔해 많이 떠오르고 자세가 가장 이상적으로 들어서는 것을 기다려 수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이렇듯 침착성을 잃지 않고 순발력을 살려 내놓은 특종사진에 감명을 받은 김지태(金智泰) 당시 사장은 <나의 이력서>라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주열군 시체사진을 허기자가 용케 촬영해와서 그때 특종사진 기사가 되어 마산시민은 물론 전국민의 분노를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고 단정지었다.

그렇다. 김주열군의 죽음으로 제2차 마산의거로 이어졌고, 4·19혁명을 촉발케 한 시발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뉴스를 쫓고 또 뉴스에 쫓기며 긴박하게 살아가는 기자들은 특종기사와 특종사진에 매달려 강박감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고통의 소산으로 여길 이 세상에 한 장밖에 없는 특종사진은 바로 중요한 역사의 핵심을 결정적인 순간에 포착했기 때문에 기자는 한마디로 역사의 목격자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거친 뉴스현장을 밟지 않고서는 제 아무리 유능한 기자라 하여도 촬영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몇백분의 1초의 셔터속도로 승부를 걸다시피하는 기자는 그야말로 물불 가리지 않고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결연한 용기를 가진 전천후의 사나이로 부르고 싶다.

무엇보다도 허종기자의 김주열 특종사진이 신문 첫머리에 실렸기 때문에 제2차 마산의거의 불기둥이 솟구쳤으며, 이어서 4·19의 불바람을 일으켰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한 순간을 영원으로 이어온 포토 저널리즘 진수임을 강조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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