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을 지낸 이관명(李觀命 : 1661~1733)이 당하관이었을 때 영남민심을 두루 살피고 나서 숙종을 알현하였다. 용상에 좌정한 숙종이 나직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한결 나아졌던가? 아니면 민폐로 인해 형편이 곤궁하지는 않았던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관명이 거침없이 아뢰었다. “상감의 은덕으로 관리들의 몸가짐이 반듯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는데 갖은 정성을 다하고 있었사옵니다. 그런데 통영소속으로 되어있는 섬 하나가 어느 후궁의 땅이라하여 강제로 좌장(坐贓)하는 것이 너무나 많아 아우성이 대단하더이다. 그 곳 백성들이 바치는 것이 하도 많다보니 그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 하는지라 민심을 수습하려고 애를 먹었사옵니다.”



잠자코 듣고있던 숙종은 후궁이 연루되었다는 말을 듣자 노발대발하고 말았다. 앞에 놓인 상을 발로 걷어차면서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이쯤되자, 낌새가 살벌해지고 말았다. 의기소침해져야 할 이관명은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대범한 태도를 보이며 입을 떼었다.



“예전에 소신이 상감을 뫼시고 경연에 참예하올 때는 그토록 너그럽고 훌륭하였사옵니다. 소신이 어명을 받자옵고 조선 곳곳을 헤매고 다닌 것이 일년도 채 안되었는데 이제 와보니 상감의 과격하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민망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간 상감께 충간(忠諫)하는 신하가 없었다는 증거요, 언로가 막힌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나이까? 이는 바로 상감을 보필하는 신하가 전무했기로 앞으로 군신간의 활발한 언로소통을 위해서라도 여기에 신하들을 즉각 파직시킴이 옳을줄 아옵니다.”



이관명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간언하자 분위기가 아연 긴장되고 말았다. 숙종이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예기치않은 전교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여기, 이관명에게 부제학에 제수하노라.” 이어 다시 분부를 내렸다. “부제학 이관명에게 홍문제학에 제수하노라.” 또 다시 세 번째 어명이 내려졌다. “홍문제학 이관명에게 호조판서에 제수하노라.”



이런 파격적 인사를 불시에 단행하자 만조백관들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리둥절하고만 있었다.



이윽고 숙종이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경의 간곡한 충간으로 이제야 과인의 부족함을 깨달았도다. 경을 호조판서에 제수하려함은 민폐가 생길 때 서슴지 말고 모조리 알리고 악습 또한 발호하지 못하도록 하여 만백성이 태평성대하도록 하라!”



일찍이 공자도 권력자에게 충고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고 설파하였다. 또한 공자는 신하로서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은 신하로서의 당연한 도리요 의무라 했다. 그러니깐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따르면 간언에는 다섯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이렇게도 들리고 저렇게도 들리도록 두루뭉수리로 얼버무려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말을 꾸미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허리를 굽힐대로 굽혀가며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넷째로 솔직하게 직간한다. 다섯째는 공자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긴 것으로 슬쩍 돌려대며 말하는 풍간(諷諫)이 있다.



이 풍간을 들먹인 것은 바로 후환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당시는 서슬퍼런 전제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앞서 언급한대로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아래로는 지방자치단체장에 이르기까지 직간이건 풍간이건 마음을 열고 들을 수 있어야만 반듯한 공무수행이 이뤄지리라 확신한다.



무엇보다 측근들이 윗분의 눈치나 살피고 비위를 맞추며 아부만 하는 알량한 백리지재(百里之才)는 하루빨리 내몰아야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직간하는 공복이 그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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