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마산에서는 또 한명의 긴급조치 희생자가 나왔다. 육군 보안사령부는 당시 재일교포 학생이 낀 서울대 의대 학생간첩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중에는 마산 출신으로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의대 2학년이던 서광태(당시 24세)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긴급조치 9호 위반 등이었다. 그러나 이후 법원에서 반공법상 간첩죄는 인정되지 않았고, 나머지 혐의만 인정돼 징역 8년의 실형을 받고 복역중 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후 최규하 정권의 특별사면으로 모두 석방됐다.

이 사건 또한 유신정권이 조작한 전형적인 간첩단 사건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현재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심의를 기다리고 있는 중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울의대 재학중 구속돼 이선관(시인)·김종철(부마항쟁 주도·작고)씨 등에 의해 마산에서 활발한 구명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던 당사자인 서광태씨는 현재 서울에서 의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눈물로 아들의 구명을 호소하고 다녔던 그의 모친 최말순씨(79)도 서울에 생존해있다. 특히 최 여사는 현 정권 출범 후 이희호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당시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과 모임을 갖는 등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는 전언이다. 또한 그의 여동생인 서광기(45)씨는 남편과 함께 마산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당시 이 사건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마산MBC 박진해 프로듀서가 보관중이던 최말순씨의 호소문을 게재한다.

<호소문 designtimesp=22395>

이 사람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2학년에 재학 중 재일교포 학생 강종헌(당시 서울의대 2년)의 학생 간첩사건에 의해 반공법, 국가보안법, 긴급조치 9호 등의 죄명으로 징역 8년, 자격정지 8년의 형을 받고 광주교도소에 복역중인 서광태의 에미입니다.

서울의대 학생이던 제 자식놈이 하루 아침에 이런 엄청난 죄명으로 될 때까지의 억울하고 피맺힌 원통한 심정을 호소하고자 이 글을 씁니다.

제 아들놈은 등교 도중 강의실 앞에서 1975년 11월 29일 아무 영문도 모르게 육군 보안사에 연행되어 갔습니다. 학교 간 자식이 두달동안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그 애태움은 자식을 가진 부모인들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실 것입니다. 서울역 부근의 지하실로 끌려간 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또 무었 때문에 잡혀왔는지 설명도 없이 무수히 구타를 하더랍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정강이 아래에 박달나무 곤봉을 끼운 채 군화발로 허벅지를 무수히 짓밟아 나무는 동강이 나고 다리는 살점이 찍찍 찢어지고 떨어져 나가 기진맥진한 채 몇 번을 기절하고, 일주일씩이나 거의 한잠도 재우지 않는 불면의 고통에 산다는 것조차 포기해버린 시간이 두달이었답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칩니다. 내 아들놈이 이렇게 수사를 받아 그 곳에서 만들어진 자술서가 공소장이 되고, 그 공소장이 판결의 근거가 되어 부모와 생이별을 한 채 생사가 기약없는 딴 세상에 있으니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전 그다지 배운 게 없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무식한 아녀자의 소견으로도 이것이 어떻게 하여 간첩죄, 반공법, 국가보안법, 긴급조치 9호 등의 굴레를 쓰게 되었는지 그저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합니다.

강종헌이라는 민단계 재일교포 학생이 모국 유학생으로 서울의대에 입학하고 1973년 11월 제 아들놈이 같은 반 교포학생 강종헌이 불온한 언동을 하고 다닌다고 당시 서울 문리대 교수 전광용, 이창귀, 정영호 등 세분에게 신고를 했는데 이것이 묵살당한 데서 비롯됩니다.

그 때는 제 나름대로 알아본 결과 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했기 때문에 경찰이나 학교 당국에서 학생들의 말소리만 좀 크게 들려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합니다.

학생이, 그것도 재일교포 학생이 불온한 언동을 한다는 알림을 그대로 잊어버릴 만큼 무책임한 교수나 학교 당국은 아무런 책임이 없고 신고를 한 제 자식놈만 거의 3년에 가깝게 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에미로서는 이런 억울한 누명을 쓴 자식에게 진실로 죄스러운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내 자식놈은 문리대 시절 학생회 간부로서 데모의 와중에 휩쓸린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온 가족이 한사코 데모에 가담하지 말도록 말렸습니다. 아무런 불만도 있을 수 없는 제겐 평탄한 환경 속에서 의사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욕망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의 행동이 저주스럽기조차 합니다. 데모 좀 한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의사로서의 조용한 생활을 바랬기 때문에 데모를 못하도록 말린 게 이렇게 되었으니 천추의 한이 됩니다.

전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정부의 말이라면 다 믿었습니다. TV 방송극에 나오는 반공 실화극조차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 속에 나오는 대공수사관들은 진짜 간첩과 억울한 사람은 잘도 찾아내어서 상과 벌을 공정하게 줍니다. 제 이런 상식으로서는 불온한 말을 하는 재일교포 학생을 신고한 제 아들놈은 중벌을 받고, 신고를 받고 잊어버린 교수들은 버젓이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는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계속 designtimesp=2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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