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정권이 도내 출신 4명의 젊은이들을 재심의 기회도 박탈한 채 사형시킨 75년 4월, 도내 대학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경남대학교는 살벌했던 시국과는 정반대로 뜬금없이 ‘보다 밝고 명랑한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학생회 주도로 ‘학원정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4월 16일부터 26일까지 11일간 벌어진 ‘학원정화운동’의 주요내용은 △배지 바로달기 △유치원 등 통행금지구역 지키기 △화장실 청결사용 △보호구역 내의 잔디와 나무 보호 △꽁초와 휴지는 휴지통에 버리기 △시험중 부정행위 안하기 등이었다.

지역 대학가의 이같은 분위기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방적 찬양만을 강요했던 당시의 강압적인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72년 11월 15일, 이른바 10월유신이 단행된 직후 <경남대학보 designtimesp=22979>는 ‘10월유신과 대학생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사설을 싣고 있다.

“1천여 경대, 산전학생 여러분, ①평화통일의 지향 ②국력의 조직능률의 극대화 ③안정과 번영 ④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10월유신에 대해 본란은 다음의 몇가지 점을 강조하면서 여러분의 새로운 인식 속에 현실긍정의 올바른 자세확립이 있길 바라마지 않는다.”

이렇게 10월유신을 찬양하는 결론을 미리 제시하며 시작한 사설은 △선진국의 정칟경제이론 중에서 우리 풍토에 맞는 것만 골라내서 그것을 다시 우리 현실에 맞는 이론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강력한 영도자에 의한 근대화와 자립경제를 이룩해야 할 것 등 독재를 합리화하는 논조로 일관하고 있다.

또 같은 날 4면에는 ‘10월유신을 말하는 교수·학생 좌담회’를 싣고 있다. 국어교육과 신상철 교수의 사회로 신덕(무역2)·조달옥(국2)·신기식(농축1)·이경숙(요업1) 등 학생들이 참석한 이 좌담회 또한 10월유신의 긍정적 측면만 강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같은 찬양분위기는 급기야 75년 5월에 이르러 교수와 학생 전체가 관제데모에 동원되는 상황까지 연출하게 된다.

다음은 당시 ‘도민 안보궐기대회’를 전하는 <경남대학보 designtimesp=22990> 5월 12일자 1면 기사 전문이다.

“본 대학 및 전문학교 학생 1000여명은 7일 상오 10시, 15만 도민이 참가한 가운데 마산공설운동장에서 성대히 거행된 도민 안보궐기대회에 참가했다.

2시간동안 진행된 공설운동장에서의 궐기대회가 끝난 뒤에 경대인들은 방송차와 기수단과 악대를 뒤이어 공설운동장→오동동→서성동 분수로터리→해안도로로 가두행진을 실시하기도 했는데 교수들도 시종 참여했다.

한편 학원 산하 마산공고와 마산 중앙중학교에서도 반공궐기대회에 참가하여 멸공통일을 다짐하였다.”

이처럼 당시 유신정권 하의 마산은 서울지역 유학생을 비롯한 일부 대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독재정권의 충실한 협조자 내지는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지도층이라는 대학교수나 언론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업가나 고위공무원들도 예외없이 유신정권에 참여했다. 심지어 60년 3·15마산시민항쟁에 앞장서 참여했던 이른바 ‘민주투사’들마저 대부분 유신정권의 공화당에 이름을 걸치는 등 투항하고 말았다.

기자는 최근 마산의 한 헌책방에서 71년 2월 공화당 경남도지부(부산 포함)가 작성한 <도지부 당직자 명단 designtimesp=23003> 책자를 발견했다.

이 명단에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역원로로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 명단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공화당 정권에 아부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당시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억지로 당직을 맡은 경우도 없지 않다고 보는 까닭이다.

그러나 당시 지역사회의 기득권층이 어떤 사람들이었나를 살펴보는 의미에서 이들의 면면을 살펴 본다.

LG그룹의 일족 중 한명으로 국회 부의장까지 역임했던 구태회씨(진주 출신)가 도지부 위원장으로 있던 당시 공화당은 경남·부산지역의 각계 원로 36명을 고문으로, 업종과 부문별 대표급 49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우선 고문에는 남선일보(현 경남신문) 사장과 자유당 국회의원·마산시장·마산문화방송 사장·마산대(현 경남대) 학장 등을 거친 김종신씨가 첫 번째로 올라 있다. 또한 목발 선생으로 불리며 마산일보(현 경남신문) 사장과 마산사 편찬위원 등을 역임했던 김형윤씨도 두 번째 명단에 올라있다.

진주시교육감 출신인 강용성씨와 배성근 목사, 자유민보 사장과 도지사를 거친 김철수씨도 있었고, 불국사와 통도사 주지였던 박청하 스님, 당시 거창대성고교 이사장 양재원씨도 눈에 띈다.

자문위원에는 우선 경남일보 사장 출신인 최재호씨(당시 진주 삼현여고 교장)와 마산부시장 및 마진건설 사장이었던 조인규씨, 삼진중학교장이었던 홍인석씨, 조산원협회 부회장 이재숙씨, 거제 애광원 김임순 원장, 마산대학·제일여고 재단의 배두이씨 등이 포함돼 있었다.

분과위원회에는 유원산업 사장이었던 최재형씨, 서울신문 기자를 거쳐 마산시체육회 사무국장을 맡은 바 있는 이상규씨, 마산부시장과 마산상의 사무국장이었던 송명호씨, 3·15마산시민항쟁 주동인물 중 한명인 김학득씨, 마산일보 부사장 출신인 최우영씨, 마산공동탁주 대표로 최근 마산시의회 의장을 했던 이성근씨 등 각계 인사가 총망라됐다.

청년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은 당시 홍합양식업을 하던 이대경씨가 맡고 있었고, 부녀분과위원회에는 마산의 곽복남씨와 김민행씨가 눈에 띈다. 특히 중앙타이피스트학원장이었던 김민행씨는 도지부 부위원장의 직책에 있었는데 이는 박정희와 각별한 인연에서 비롯됐다고 보기도 한다. 김민행씨는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시절 상관이었던 박승환 중위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녀에 대해서는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이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designtimesp=23022>는 책에도 이렇게 언급돼 있다.

“박승환의 미망인 김순자(뒤에 김민행으로 개명) 할머니(75세)는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다. “1963년에 박의장이 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마산에 내려왔는데, 지방유지들과의 모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박승환의 처입니다’고 인사했더니 갑자기 정자세를 취하더니 깍듯이 인사를 하여 주위 사람들이 놀랐습니다.””(115편 박승환 중위 편)

이처럼 당시 공화당에는 지역의 유지급에 해당하는 사람은 거의 빠짐없이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공화당이 민심을 사기 위해 존경받는 인물들에게 강제적으로 당직을 맡겼다는 주장도 있다.

김형윤씨가 도지부 고문이었다는 데 대해서도 한 후배언론인은 “일관된 무정부주의자였던 목발선생이 정당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는 게 말이 되느냐. 당시 집권층이 억지로 이름을 넣은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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