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여자가 조용하게 드러누운 모양

정말 이름 그대로 그렇다. 석강마을 들머리에서 바라보니 마치 배부른 여자가 조용하게 드러누운 모양을 하고 있다. 오른쪽 반듯한 이마에서 머리칼이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이마 바로 아래에는 오똑 콧날이 서 있다.
조금 왼쪽으로 눈길을 옮기면 콧날 아래에 작은 젖가슴 같기도 하고 턱처럼도 보이는 데가 있으며 바로 그 옆 바위 봉우리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젖가슴 그대로다. 산은 젖가슴을 지나 한 차례 굽이친 다음 다시 조금씩 높아지는데, 어찌 보면 아이를 가진 여인의 배 같기도 하고 살짝 돌아누운 엉덩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생김새에 따라 이름이 붙은 산은 여럿 봤지만 이처럼 아무런 말도 듣지 않고 그야말로 딱 바라만 보고 한 눈에 알아차리는 일은 여태까지 없었다. 무어라 곁들이는 설명을 들으면서 ‘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여긴 적은 몇 차례 있어도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산들을 일러 부처가 누워 있는 와불(臥佛)산이라고도 하고 다리를 벌린 모양이라며 무슨무슨 근곡(根谷)이라 이르기도 한다. 또 뾰족 솟은 산봉우리는 필(筆)봉이나 문필봉이라는 이름을 갖기 십상인데 사실은 너무 범상하기 때문에 감흥을 잣기에는 모자랄 때가 많다.
하지만 미녀산은 산자락으로 접어들수록 여인의 모양이 더욱 뚜렷해진다. 들머리 널찍한 길은, 이미 활엽수들에게 자리를 내어 준 다른 산들과 달리 양옆으로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이른 아침 우거진 소나무에서 나는 알싸한 향기는 산꾼의 머리를 맑게 해 준다. 이 같은 삼림욕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면서 30분쯤 오르면 당산나무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 산으로 변신한 여인은 한결 분명한 자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녀산은 이웃 장군봉과 어울려 전설을 하나 지어냈다. 옛날 이곳이 온통 바다였을 때 나룻배를 탄 장군이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었다. 가엽게 여긴 하늘나라 옥황상제가 가장 아끼는 딸을 보내 구하도록 했는데 그만 이 선남선녀 둘이 눈이 맞아 서로 사랑을 하게 됐다.
이를테면 여기 옥황상제의 딸은 ‘혼전 임신’을 한 셈이고, 이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옥황상제가 ‘너희 둘은 거기 그대로 산이 되어 누워 있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군봉은 미녀산 북쪽 건너편에 있는데, 그 산마루에서 보는 미녀산의 모양도 꽤 아름답다고 한다.
당산나무에서 5분쯤 가면 골짜기를 끼고 길이 갈라지는 한가운데에 유방샘이 있다. 여러 기록을 보면 예전엔 양물샘이라 한 듯한데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고 물도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본격 등산길은 여기서 비롯된다.
왼쪽은 여인의 젖가슴 아래쪽으로 이르는 길이고 오른쪽은 이 미인의 고운 이마로 곧장 데려다 주는 길이다. 아마 3년쯤 전만 해도 이마로 바로 가는 길이 없어서 왼쪽을 타고 올라 오른쪽 유방봉을 거쳐 이마에 올랐다가 되짚어 내려와서 다시 왼쪽으로 마루금을 타고 여인의 배에 갔다고 한다.
지금은 유방샘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이마에서 배까지 차례대로 거칠 수 있다. 다만 산줄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조금 가파르기는 하지만 30분 안팎이면 가 닿으므로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
몸이 더워질 만하면 바로 앞에 이마가 나온다. 큰 숨 한 번 들이쉬고 마루를 타고 걸음을 옮긴다. 여기서는 좌우로 펼쳐지는 이웃 들판과 건너편 산자락을 마음껏 눈에 담을 수 있다.
이마에서 젖가슴까지 이르는 길은 오르내림이 꽤 큰 편이다. 게다가 바위가 곳곳에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아주 크지는 않은데다 산길이 뚜렷해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지나치게 가팔라 위험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또 밧줄을 매어놓은 데도 있지만, 발아래 산길을 즐기다 보면 어느덧 유방봉에 이른다.
유방봉은 온통 바위로 이뤄져 있다. 봉우리 끝은 일부러 다듬은 것처럼 동그랗게 돼 있어 유두 같다는 느낌이 난다. 감히 여기에 서지는 못하고 한 걸음 비켜 아래쪽에 서면 발 밑에 가조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건너편 산자락 사이에 시내가 흐르고 거뭇거뭇한 논밭이 둥그렇게 펼쳐진다. 냇가와 산자락에는 크고작은 마을이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저쪽 산행 들머리 석강마을 한 쪽 구석에 파란색 공장 지붕이 눈에 확 띈다. 둘레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저수지가 보인다. 유방샘이나 그 위에서부터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린 물을 모아놓은 곳인데 산자락 이쪽 들판은 여기에 기대어 농사를 짓는 모양이다. 저수지 아래에는 나란히 마을이 두 개 붙어 있는데 이름이 공교롭게도 양기와 음기다. 이들 모두가 미녀산과 관련된 성신(性神)숭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미녀산의 최고봉은 이마(890m)도 아니고 유방봉도 아니다. 임신한 듯 보이는 배부른 데가 정상(930m)인데 뱃속 아기한테 장래가 달려 있음을 일러주는 듯하다. 유방봉에서 배부른 산마루까지는 30분 남짓 걸리고 산마루서 산아래까지는 넉넉잡아 1시간이면 된다.

▶ 여행정보

거창은 88고속도로를 타고 들어가면 가장 빠르다. 마산·창원에서는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서진주에서 대전~통영 고속도로로 접어든 다음 함양 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로 옮기게 된다.
거창 나들목을 지나면 곧바로 가조 나들목이 나오는데 여기로 빠져나와 곧바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5분도 채 안 돼 등산의 출발점이 되는 폐교된 석강초교와 양기·음기마을이 나란히 있다.
조금 편하게 오르려면 석강마을에서 출발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산길의 호젓함과 솔숲이 주는 삼림욕을 일찍부터 누리려면 조금만 더 신작로 따라 가서 양기·음기마을로 접어드는 편이 낫다. 게다가 석강마을은 농공단지를 끼고 있어서 들머리에서부터 쇳소리를 듣고 쇠냄새를 맡아야 하지만 양기·음기마을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좋다.
살짝 들여다보이는 문간 너머에서는 아낙네 여럿이 김장김치를 담그고 있다. 잎진 감나무에는 별나게도 까치밥이 서른 개 넘게 달렸다. 여느 농촌마을과 달리 아이들 쨍쨍한 웃음소리도 듣기 좋았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시골 마을에 노부부가 산다면 무슨 김장을 저리 많이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대문 앞 자동차는 부산 번호판을 달고 있다. 그렇다면 둘째 셋째 며느리까지 불러모아 김장을 한다고 봐야 하나.
위쪽 들판은 이미 쟁기질이 끝나 있다. 곳곳에 묵정밭도 널려 있는데 텃밭에 나와 앉은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도 눈에 띈다. 한 할아버지는 목 긴 장화를 신고 경운기를 모는데, 짐칸에는 장작으로 삼을 나무 등걸이 실려 있다.
가조에는 온천이 있다. 미녀산에 오른 다음 잠시 들러 온천물에 몸을 담가도 좋겠다. 관광단지를 만든다고 도로를 비롯해 터를 닦는 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목욕탕이 두어 군데 문을 열어두고 있다.
양기·음기마을에서 서너 걸음만 옮기면 석강마을이고 석강마을에서 다시 같은 방향으로 서너 걸음 가면 가조온천이니, 일부러가 아니라 지나는 길에 그냥 들르면 된다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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