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마저 검게 타버린 네 가슴에 신라천년이 숨쉰다

창원 일대가 한 때 불교 성지였다는 사실은, 아마 모르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창원시 북면 백월산에는 신라의 선남(善男)이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스스로 부처가 됐다는 전설이 어려 있다.
득도나 견성(見性)을 거듭해 깨달음의 경지가 높은 큰스님이 됐다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 황금빛 감도는 부처가 되어(成佛), 티끌 가득한 속세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다는 얘긴데, 신라 불교의 자존심과 독창성을 한껏 드러내보이는 일대 사건이라고들 한다.
이래서 경주 불국사와 같은 시기 임금의 명령으로 백월산 기슭에 남사(南寺)를 짓고 부처를 모셨으니, 그 뒤 빈대가 들끓어 스님은 흩어지고 절간은 망했다고 하나 이것만으로도 창원 일대가 성지였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지금은 창원 봉림동 일대에 있던 진경대사의 봉림사가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로 크게 이름났다는 사실이 더 많이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것은 앞 세대의 결과일 뿐이지 무슨 크게 내세울 일은 아니다.
그런데 노힐부득 등의 일은 700년대 초반에 일어났고 봉림사의 진경대사는 900년대 초반에 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러니 둘 사이를 이어주는 사람과 사건이 있어야 창원의 불교 역사가 온전해질 수 있겠는데 이 노릇을 바로 무염(無染·801~888)이 하고 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8대손인 무염은 지금 알려진 바로는 창원 일대에 여러 절간을 만들어 세웠다. 창원 불모산 성주사와 진해 굴암산 성흥사는 무염의 신통력이나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를 물리친 기념으로 세웠고 여기 이 전단산 우곡사도 무염을 창건주로 하고 있다.
이를테면 우곡사는 성주사·성흥사와 함께 신라 천년고찰인 셈인데, 세인의 눈으로 볼 때는 창건 동기가 뚜렷하지 않다. 왜 지었을까 생각해 봐도 그럴듯한 답이 나오지는 않지만, 다만 낙동강을 낀 곡창과 왜구를 막아주는 산악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병참 기지 노릇은 할만했겠다는 생각은 해본다.
우곡사는 들머리에 있는 벼락맞은 은행나무가 인상 깊다. 20년쯤 전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나무의 둘레는 네 아름쯤 되고 키가 30m를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벼락을 맞아 속은 시커멓게 타버린 채 두 길 높이 이상은 자취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가 숨을 거두고 죽었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은행나무는 예로부터 목숨이 질긴 나무로 이름나 있는데 이를테면 2억 5000만년 전 생겨난 이래 네 차례나 지구를 뒤덮은 빙하기를 모조리 견뎌낸 대단한 나무인 것이다.
벼락 맞은 데는 불에 타버려 죽고 말았지만 그 옆자리에 바로 싹을 내어 줄기를 올렸다. 이 줄기들이 지금은 사람 팔뚝이나 허벅지만한 굵기로 다시 하늘을 향해 뻗어오르고 있은 것이다.
지난 태풍에 잎을 죄다 날려버렸는지 노릇노릇한 단풍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무를 보면서 품는 감회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이는 어린 시절 부모님 속을 태운 기억이 새삼 끓어올라 마음이 아프겠고 어떤 이는 텅 비어버린 속내를 들여다보면서 무상을 곱씹을 수도 있으리라. 청춘들은 저도 저런 뜨거움으로 한 세상 살고 싶다고 여길는지도 모를 일이다.
쌀쌀한 초겨울 오후 찾아든 절간은 고즈넉하다. 다만 사람 발길이 끊어지지는 않는데 아랫마을 사람들은 띄엄띄엄 불공드리러 오고 크고작은 물통을 차에 싣고 와 절간 마당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가는 이들도 제법 많다.
오는 길에 만난 동네 사람들은 이 약수 자랑이 대단하다. “이 물은요, 받아서 한 달 동안 놔 둬도 괜찮아요. 옛날에는 피부병에 좋다 해서 몸을 씻기도 했다고요.” 과연 상큼한 물맛이다.
역사가 오랜 절간이건만 유물은 흩어진 기와조각말고는 거의 없다. 대웅전은 새로 지은 맛이 풀풀 나고 왼쪽 아래의, 현판도 없는 건물에는 부처님과 용왕님과 산신령님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런 배치는 아마 처음 보는데 전단산(봉림산 또는 정병산의 옛 이름)이니까 산신령, 좋은 물이 나오니까 용왕신을 함께 모셨겠거니 짐작해 본다. 불상을 건물 사정에 따라 가운데가 아니라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그려놓은 데다 대웅전 바로 왼쪽에 따로 신령각으로 보이는 건물을 지은 것을 보니 편의나 현실에 이끌려 원칙을 뒷전으로 밀어놓았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절터는 아주 그럴 듯하다. 조금 좁은 듯하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골짜기를 건너 마주보이는 산자락이 넉넉하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곡선이 느슨하고 여유롭다. 뿐만 아니라 절터 이쪽저쪽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즐비해 오랜 역사를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은행나무와 대웅전 사이 느티나무도 그럴듯하고 뒤쪽으로 둘러선 참나무들도 울창하다. 왼쪽 아래위로는 요즘 보기 드문 서어나무들이 잎을 떨군 채 불끈불끈 솟은 근육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자랑하고 있다.
우곡사에 들르면 이러저런 나무를 볼 수 있다. 여느 절에서나 다 볼 수 있는 풍경이라면 따로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예사롭지 않게 나이를 먹으면서 풍상을 견딘 이것들을 보며 절의 역사를 짚어보기도 하고 마음 속 감회의 한 자락을 꺼내어 곱씹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산 중턱 절간에 들렀다가는 온 길을 되짚어 그대로 내려가도 좋고 절간 오른쪽을 타고 전단산 꼭대기까지 갈 수도 있다. 꼭대기에 오르면 창원시내 용지못도 내려다보이고 뒤편으로 주남저수지와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 자락도 눈에 담을 수 있다.
그냥 발길을 돌려 내려오는 길은 아늑하다. 어느 정도 내려오고 나면 길 양옆에서 갈대가 서걱거리고 조금 더 걸음을 하면 크지 않은 저수지가 물을 머금은 채 엎드렸다.
산자락 길은 자동차가 잘 다닐 수 있도록 포장은 돼 있지만 아직은 나무가 하늘을 가려주고 있다. 문득 눈을 들어 나무를 보니까, 지난 태풍 매미로 꺾인 가지 한가운데서 새잎 몇 녀석이 연둣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 여행정보

우곡사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창원이나 마산에서 국도 25호선을 따라 동읍쪽으로 빠져나가면 된다. 동읍에서 주남저수지로 접어드는 길목을 지나 조금 더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국방과학연구소 창원시험장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는데 이 길로 접어들면 다 찾은 셈이다.
여기서 남해고속도로를 아래로 가로지른 다음 오른편에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는 자여마을을 뒤로 하고 곧장 가면 국방과학연구소 정문이 나온다. 왼편으로 보면 좁은 길이 있는데 여기서 2km 남짓 가면 우곡사가 자리잡고 있다.
왼편으로 흙을 파 뒤집고 하는 공사가 한창인데 길머리에 올라서면 우곡저수지가 반긴다. 크지는 않지만 오후 무렵에 들르면 햇살을 되쏘는 물결 무늬를 보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산자락에 접어들며 접어든 다음에는 20분만에 절간에 가 닿는다. 절간에서 전단산 산마루까지는 3,5km, 2시간여가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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