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독재정권의 사법살인이나 이승만 독재의 6·25양민학살이나 무고한 사람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살해됐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같은 희생자 유족으로서 꼭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지난해 10월 22일 거창양민학살 위령사업 기공식 현장에서 만난 신동숙(72) 할머니의 말이었다. 그녀는 75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불리는 4월 9일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도예종(24년생·당시 51세·삼화건설 회장)씨의 부인이다.

대구에 살고 있는 그녀는 교사출신이었으나 남편이 사형당한 후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전국을 쫓아다니느라 유일한 재산이던 한옥마저 팔고 지금은 전셋집에 혼자 살고 있다.

26일 기자와 전화통화를 한 그녀는 비장한 목소리로 “이제 늙은 데다 혈압이 높고 심장이 약해 기력이 없지만 진상규명을 이루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아직도 박정희씨에 대한 증오심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야 물론이지만 이미 박정희도 죽은 사람이고, 오히려 정말 답답한 건 우리 국민들”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다들 박정희가 잘했다고 하는데 너무 답답합니다. 장준하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되더라도 그 사람만은 대통령이 돼선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 아닙니까.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을 때려잡던 왜놈 장교였고 여순사건을 지가 일으켜 놓고 동지들을 밀고해 자기만 살아나온 사람 아닙니까. 그런 박정희기념관을 정부 돈으로 짓는다는 걸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요.”

알려진 대로 세칭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시리즈 69회에서 소개한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으로 지목돼 도예종씨 등 8명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다음날 새벽 전격적으로 사형집행됐던 사건이다.

이들 8명의 사형이 집행된 75년 4월 9일을 왜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부르는 지, 사건이 어떻게 조작됐는지 등은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사건 내용을 상세히 알고 싶다면 천주교 인권위원회 홈페이지(http://www.cathrights.or.kr)의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http://www.cathrights.or.kr/0409/main.html) 사이트에 들어가면 관련자료를 볼 수 있다.

특히 이 사건에 대해선 서울과 대구에서 오랫동안 진상규명운동이 벌어져 왔다. 따라서 이는 대개 대구지역과 관련된 사건으로 취급, 경남도내에서는 인권·사회단체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사형된 8명 중 4명이 경남 출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경남출신 4명의 인적사항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수병=1936년 12월 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생, 부산사범·경희대학교 졸업, 4·19 이후 경희대학교 학생민족통일연맹 위원장, 5·16 이후 구속, 혁명재판에서 15년형 선고, 7년 복역, 74년 4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당시 삼락 일어학원 강사),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75년 4월 9일 사형집행, 경남 의령군 신반리에 안장.

△서도원=1923년 3월 28일 경남 창녕군 대합면 신당리 출생,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4·19 이전 청구대학교(현 영남대학) 학생주임·정치학 강의, 4·19 이후 민주민족청년동맹위원장, 5·16 이후 혁명재판에서 7년 언도(2년 7개월 복역), 67년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구속(무죄판결), 74년 4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당시 침술사),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75년 4월 9일 사형 집행, 경남 창녕 선산에 안장.

△하재완=1931년 1월 10일 경남 창녕군 이방면 안리 출생, 단국대학교 졸업, 50년 입대, 57년 중사 제대, 양조장 경영, 4·19 이후 민주자주통일협의회 경상북도 협의회 부위원장, 74년 4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당시 건축업),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74년 4월 9일 사형집행(대구 칠곡 현대공원에 안장)

△김용원=1935년 경남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 대암마을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서울대 민통련 대의원(4·19 이후 서울대 학생민통련 참가), 64년 동양중고 교사, 소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연행돼 조사받고 나옴, 74년 4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당시 경기여고 교사), 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대통령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75년 4월 9일 사형집행.

이들 4명 외에 사형당하진 않았지만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8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으나 옥중생활 후유증으로 지난 88년 숨진 유진곤(37년생)씨도 경남 김해 출신이다. 그는 53년 부산사범대에 입학, 이수병씨 등과 함께 사회과학이론연구회 ‘암장’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56년 졸업 후 울산 신암국교에서 교사생활을 거쳐 64년 김해연구소에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74년 5월 1일 느닷없이 들이닥친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인혁당 재건위 연루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도내 출신 희생자 5명에 대한 진상규명 운동도 대부분 서울과 대구의 민주인사와 사회단체가 주도해왔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부터는 의령군 부림면 손오리 구산마을 고 이수병씨 묘역에서 경희대 동문으로 구성된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의 추모행사에 지역 사회단체인 열린사회 희망연대(공동대표 남두현·백남해·임경란)가 결합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3명의 희생자에 대한 추모사업은 아직 도내에서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는 상태다. 이런 가운데 어쩌면 ‘사법살인’의 간접적인 가해자라고도 할 수 있는 당시 유신정권에 아부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각계의 지도적인 위치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또한 현실이다.

이들이 희생된 지 26주기가 되는 오는 4월 9일 오후 7시 명동성당에서 이돈명 변호사와 강만길 선생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가 열린다. 그러나 올해에도 도내에선 이에 대한 이렇다할 움직임은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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