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나 북이나 그 어디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형제들 아니련가/ 동이나 서이나 그 어디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자매들 아니련가/ 산도 높고 물도 맑은/ 아름다운 고려산천 내 나라 내 사랑아’(노광욱 작사·작곡. 〈고려산천 내 사랑〉 중 일부)



지난 13일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마련된 재일교포 소프라노 전월선의 독창회. 넘쳐나는 관객은 아니었지만 소극장을 빽빽히 메운 관객들은 무대위에서 온몸으로 솟구치는 한을 뿜어낸 전월선의 노래에 푹 빠져 있었다.



그녀가 노래한 첫 곡은 남북분단을 담은 〈고려산천 내 사랑〉. 두 손을 가슴 한가운데 모으고 불러 내려가는 그녀의 노래에는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뒤이어 남북을 가르면서 휴전선을 흐르는 임진강을 소재로 분단아픔을 담은 북한의 명곡 〈임진강〉, 우리 민족의 한을 고스란히 담은 〈아리랑〉을 부를 때도 그 애절함은 계속됐다.



그녀의 노래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데는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이었기에, 조센진이라며 갖은 차별과 냉대속에서도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당당하게 성공한 프리마돈나였기에, 남북을 오가면서 분단의 아픔을 노래에 담아 통일을 노래한 소프라노였기에 그랬다.



전월선은 조총련 계열의 부모에게서 1958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43년 16세의 나이로 학도병으로 일본에 끌려간 아버지 전석만(72·진주생)씨와 이미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던 부모밑에서 태어난 어머니 김갑선(76·진주생)씨의 2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폐품팔이에 배달부·점원·장사 등 이국땅에서 홀로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지역상공업회 회장을 맡기도 했던 아버지 덕택에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가까이 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생활을 했다. 일본인에게 음악레슨을 받을 정도였으니 부러울 게 없었다.



하지만 배타적인 일본사회에서 조센진이라며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던 아버지 때문에 그녀는 조선민족학교에 입학해 춤·노래·무용을 배웠다. 일본아이들에게는 지기 싫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 악착같이 만들었다. 일본인 레슨 선생도 월선의 실력을 인정할 정도였다.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느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막혀있죠. 부모님들의 고통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지만 조센진이라며 나를 놀려대던 일본아이들에게 지긴 싫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의 사업이 도산하면서 그녀는 음악은 물론 대학진학마저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처했다.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면서 민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정작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했던 일본 도쿄예술대는 그녀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허락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일본아이들과는 다른 춤과 무용·노래실력을 선보이며 도쿄예술대를 수석으로 입학했고 또한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때부터는 모든 건 실력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 일본 최고의 오페라단인 ‘이기회’에 입단해 자신의 특기였던 재즈·플라멩코·탭댄스 등을 선보이면서 한국인 최초로 이기회에서 오페라 주역으로 캐스팅됐다.



이후 〈도화사〉〈피가로의 결혼〉〈나사의 회전〉〈나비부인〉 등 오페라에서 잇따라 주역으로 캐스팅돼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일본은 물론 한국과 북한, 미국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85년 평양세계음악제에 초청돼 인민문화궁전에서 공연을 가졌고, 96년과 97년에는 외국적 음악가로서 처음으로 일본정부가 주최하는 문화청예술제에 참가해 오페라 아리아·가곡·현대음악을 불렀다. 98년 한·일 공동오페라 갈라콘서트 ‘아시아에서 세계로’, 2000년 한일공동제작 환상의 오페라 〈춘향〉의 주연으로 활약했다. 이후 한국에서도 서울·광주·진주·청주·창원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독창회를 가지면서 남북화해는 물론 한·일간 민간외교의 가교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평탄한 성공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일본인으로의 귀화를 끝내 거부하고 전월선(田月仙)이라는 이름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에서 열린 독창회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리운 금강산〉을 비롯해 〈아리랑〉〈고려산천 내 사랑〉 등 한국가곡을 끊임없이 불러 조국사랑을 확인했다는데 있다.



“일본에서 월선이라는 이름을 버린다는 것은 곧 나를 버리는 것이고 조국을 버리는 것에 다름없었습니다. 민족성을 버리면서까지 성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독창회 때마다 한국가곡을 부를 수밖에 없었던 건 부모님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가르침을 노래를 통해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다. “어머니 태몽에 휘영청 밝은 달빛 한줄기가 잔잔한 호숫가의 한 떨기 수선화를 비추고 있더래요. 그래서 이름을 월선이라고 지었구요. 그 이름을 어떻게 버릴 수 있겠어요”



그녀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 이름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힘이 닿는데 까지 한·일관계 개선은 물론이고 남북통일을 위해 민간외교사절로서 몫을 다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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