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좋아 순수지, 순수하게만 세상을 살다간 얼마 안가 상처투성이가 될 것은 뻔하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한 두께의 ‘가면’을 쓰고, ‘타협’이란 옷을 걸치고, 또 그렇게 살다보니 그것이 옷인지 살갗인지도 모르고 산다. 그런 생활인 대신 맨몸으로 세상과 인간을 느끼고 고뇌하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라고 적어도 그렇게 믿어왔다. 그리하여 그들의 삶과 작품은 우리도 한때는 맨몸이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일반인이 실세계에서 지루한 일상을 버텨내는 동안, 그들은 세계의 저 안쪽에서 ‘광기’와 맞서 싸우며 인류의 역사만큼인 해묵은 질문을 곱씹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느 것을 선과 악이라 부를 수 있는가.

▶적어도 <베티 블루>의 ‘베티’에게선 그 광기를 보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의 짧고 강렬한 삶에서 우리는 그새 잊고 있던 ‘타협’의 옷을 의식하고 온전히 맨몸으로, 본능으로 살고자 하는 또하나의 자아와 대면할 수도 있다.

▶<베티 블루>의 한국판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제작된 <그녀에게 잠들다>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베티블루’가 된 것은 그 ‘광기’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어설펐기 때문이다. 광기를 특정인이 선택하는 삶의 유형이 아닌, 사랑의 유형(혹은 ‘집착’)으로 표현한 것.

▶CF 감독답게 적당히 아름답게 꾸며진 세트에 시종일관 따스한 파스텔톤이 흐르는 화면, 저작권 매입이 무산되면서 철저한 카피라는 위험을 비켜가기 위한 적당한 흉내내기. 영화는 종종 의미없이 보여지기만 하고, 대사는 허공으로 도망가버린다.

▶그렇다면 감독은 무엇을 바라고, 관객은 또 무엇을 기대한 걸까. 감독이 <베티 블루>의 의미에 충실했다면 광기의 여인 ‘베티’를 사랑하는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베티 블루>의 에로티시즘에 충실했다면 섹시한 요부 ‘베티’를 사랑하는 또다른 관객을 극장으로 이끄는데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반푼수가 집안 망친다’는 말, 살아볼수록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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